카츠키 히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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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츠키 히로미는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배우로, 1958년 4월 다카라즈카 대극장 공연 중 무대 장치에 사고로 사망했다. 쇼난 시라유리 학원 동창인 마츠시마 미나코의 대역으로 출연한 공연에서 의상 치마가 무대 장치에 감겨 사망했으며, 이 사고는 무대 안전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사고 이후 다카라즈카 가극단은 안전 설비 개선과 의상 규정 변경 등의 조치를 취했으며, 카츠키 히로미의 위령비가 다카라즈카 음악학교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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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츠키 히로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예명 | 카츠키 히로미 |
후리가나 | 카츠키 히로미 |
본명 | 오가사와라 히로에 |
다른 이름 | 히로에 짱 |
출생지 | 일본 가나가와현후지사와시 |
사망지 | 알 수 없음 |
국적 | 일본 |
민족 | 일본인 |
직업 | 여배우 |
장르 | 다카라즈카 가극단 |
활동 기간 | 1954년 - 1958년 |
신상 정보 | |
출생일 | 1936년 8월 21일 |
사망일 | 1958년 4월 1일 |
신장 | 알 수 없음 |
혈액형 | 알 수 없음 |
기타 정보 | |
![]() | |
배우자 | 알 수 없음 |
저명한 가족 | 알 수 없음 |
소속사 | 알 수 없음 |
공식 웹사이트 | 알 수 없음 |
주요 작품 | 알 수 없음 |
비고 | 알 수 없음 |
2. 약력 ㆍ 인물
쇼난 시라유리 학원 초등부, 중등부 동창이자 절친인 마쓰시마 미나코(다카라즈카 가극단 40기생)의 영향으로 쇼난 시라유리 학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다카라즈카 음악학교에 입학했다.
1958년 4월 1일, 하나구미의 공연 '봄의 춤, 꽃 안의 어린이들' 제12장 '트럼프의 나라' 장면 공연 중 사고가 발생했다. 이 공연은 3월 26일부터 4월 29일까지 예정되어 있었다. 사고는 연인 역할인 하트 6(남자)과 하트 7(여자)이 트럼프의 나라 왕과 왕비의 노여움을 사 살인 광선을 맞고 무대 아래로 내려가는 장면에서 일어났다. 원래 하트 7(여자) 역은 히나츠 유리였으나, 감기로 인해 3월 31일 낮 공연부터 카츠키 히로미가 대역으로 출연하게 되었다. 상대역인 하트 6(남자)은 우연히도 카츠키의 쇼난시라유리가쿠엔 동급생이었던 마츠시마 미나코였다.
애칭은 "히로에짱"이었다. 1954년 4월 "봄의 춤"으로 첫 무대에 섰다. 다카라즈카 입단 당시 성적은 51명 중 17등이었다.
1958년 4월 1일 다카라즈카 대극장 공연에 출연 중, 입고 있던 의상 드레스의 옷자락이 무대 장치인 세리(리프트)의 구동 부분에 말려 들어가 사망했다. 향년 23세 (만 21세)였다.
3. 사고의 상세 내용
사고는 4월 1일 밤 공연 오후 6시 25분경 발생했다. 왕의 "버튼이야!" 대사와 함께 효과음이 울리고, 카츠키와 마츠시마는 객석에서 가장 가까운 1번 세리(리프트, 세로 약 1m × 가로 약 3m)로 이동하여 함께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츠시마는 몸에 붙는 타이츠를, 카츠키는 원형 스커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마츠시마는 다음 장면을 위해 빨리 의상을 갈아입어야 했기에, 리프트가 완전히 내려가기 전에 나락으로 뛰어내려 대기실로 향했다. 세 걸음쯤 갔을 때 뒤에서 "그만둬!"라는 비명과 함께 무언가 찢어지고 흩날리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카츠키의 드레스 옷자락이 리프트의 샤프트에 감겨 돌아가고 있었다. 마츠시마의 증언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은 1초 정도의 짧은 순간에 일어났다.
카츠키가 입고 있던 드레스에는 옷자락을 넓게 펴기 위해 폭 2cm, 두께 1mm의 스틸 벨트가 허리, 무릎, 옷자락 세 부분에 원형으로 부착되어 있었다. 옷자락이 리프트 샤프트에 말려들면서, 리프트 틀의 철제 벨트와 무대 지지용 철제 앵글 사이에 카츠키의 발이 끼었고, 동시에 허리에 있던 스틸 벨트가 몸을 강하게 조여 신체가 절단되어 즉사했다.[1] 마츠시마는 카츠키의 절단 부위가 드레스에 가려져 있어 즉사했다는 사실을 바로 인지하지 못했다.
의사의 사망 진단서에 따르면, 카츠키는 허리 부분에서 절단되었고 오른쪽 발은 으스러졌으며 왼쪽 발은 무릎 아래가 골절된 상태였다. 상반신에는 이상이 없었다.[1]
다카라즈카시를 관할하는 효고노동국 니시노미야 노동기준감독서는 이 사고를 노동 재해 사망으로 인정하고, 다카라즈카 가극단에 다음과 같은 개선 조치를 명령하며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 대형 리프트를 제외한 6대의 리프트 사용을 금지했다.
현장 검증에 나선 효고현 경찰 다카라즈카 경찰서 서장은 "불가항력적인 사고가 아니며 어딘가에 과실이 있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형사과장은 리프트 조작 담당자의 책임 문제, 노출된 샤프트와 넓은 드레스 착용의 위험성, 무대 기구상의 결함 가능성을 지적하며 업무상 과실치사상죄 등 형사 책임을 가극단 및 극장 관계자에게 물을 것임을 시사했다.[2] 그러나 이후 관계자들이 형사 책임을 추궁받았는지 여부는 보도되지 않았다.
3. 1. 사고 이후의 경과
사고 당일 공연은 즉시 중단되었으나, 극 자체의 평가가 좋아 다음 날부터 공연이 재개되었고, 다음 달에는 츠키구미에서 연장하여 상연되었다.
사고 당일 공연에 다카라즈카 음악학교 본과생 신분으로 무대 실습에 참여했던 키시 카오리는 약 40년 후 자신의 저서 '무지개빛 기억'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리프트가 평소처럼 내려간) 다음 순간, 무대가 심하게 흔들리고 '꺄악'하는 엄청난 비명이, 그야말로 단말마의 비명이 우리 귀에 꽂혔다."
카츠키 히로미의 장례 절차는 다음과 같았다.
카츠키 히로미의 묘소는 도쿄도 아다치구 이코에 위치한 토가쿠지(東岳寺)에 있다.
현재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공식 역사 기록에서는 이 사건이 언급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키시 카오리에 따르면, 과거 다카라즈카 대극장이 존재했을 당시에는 매년 4월 1일, 구 대극장 지하의 1번 리프트 아래에 헌화하며 고인의 명복을 비는 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이 행사는 구 대극장이 철거되면서 중단되었다. 구 대극장 해체를 앞둔 1992년 9월 18일에는 음악 위령제가 열렸으나, 이는 카츠키 히로미를 포함한 758명의 고인이 된 다카라즈카 관계자 전체를 추모하는 행사였으며, 카츠키 히로미 개인을 위한 추모 행사는 아니었다.
다카라즈카 음악학교 구 교사 부지에 세워졌던 위령비는 학교 이전 후에도 유지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으며, 현재는 무코강변의 다카라즈카 음악학교 주차장 내에 안치되어 있다. 매년 4월 1일에는 본과생들이 이곳에 헌화를 한다. 위령비 앞면에는 야나기와라 뱌쿠렌이 카츠키 히로미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시구가 초서체로 새겨져 있다. "눈에 눈물 오늘 밤은 달이 없는 것을 향기로운 벚꽃이 옅게 빛나네 백련(眼に涙 今宵月なき 香すみれ ほのかに匂へ うす紅にして 白蓮)". 뒷면에는 해서체로 "쇼와 33년 4월 1일, 대극장의 무대 위에서 세상을 떠나다. 카츠키 히로미 향년 21세. 시공 혼도 마사히로(昭和三十三年四月一日 大劇場の舞台にて逝く 香月弘美 享年二十一才 施主 本藤昌宏)"라는 금석문이 새겨져 있다. 이 위령비는 다카라즈카 대교나 한큐 이마즈선 열차 안에서도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4. 기타
사고 당시 다카라즈카 음악학교 본과생 신분으로 무대 실습에 참가했던 사시 카오리는 약 40년 후 자신의 저서 《무지개빛 기억》(虹色の記憶)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리프트가 평소처럼 내려간) 다음 순간, 무대가 심하게 흔들리고 '꺄악'하는 엄청난 비명이, 그야말로 단말마의 비명이 우리 귀에 꽂혔다."
카츠키 히로미를 기리는 위령비는 1958년 5월 20일 다카라즈카 음악학교 교정에 세워졌다. 현재는 무코강(武庫川) 변에 있는 다카라즈카 음악학교 주차장 안에 안치되어 있으며, 뜻있는 사람들에 의해 헌화가 이어지고 있다.
위령비 앞면에는 야나기와라 뱌쿠렌(柳原白蓮)이 카츠키 히로미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추모시가 초서체로 새겨져 있다. 내용은 眼に涙 今宵月なき 香すみれ うす紫に にほへ わか花 白蓮|눈에 눈물 오늘 밤은 달이 없는 것을 향기로운 벚꽃이 옅게 빛나네 백련일본어이다. 뒷면에는 해서체로 昭和丗三年四月一日 大劇場の舞台の上に逝く 香月弘美 享年廿一才 時宗 本藤昌宏|쇼와 33년(1958년) 4월 1일, 대극장의 무대 위에서 세상을 떠나다 카츠키 히로미 향년 21세 시공 혼도 마사히로일본어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위령비는 다카라즈카 대교나 한큐 전철 이마즈선에서도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참조
[1]
뉴스
朝日新聞
朝日新聞, 大阪本社版
1958-04-02
[2]
뉴스
朝日新聞
朝日新聞
1958-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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